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주필산 전투]] === 이렇듯 당군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현도성]] 등 5개의 성을 격파하면서 각각 교두보를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지만 백암성 함락 이후로는 공세가 한풀 꺾인 모습을 보인다. 하루이틀 만에 전광석화처럼 전장을 옮기며 들이치던 개전 때에 비해, 요동방어선을 돌파하거나 평양을 향해야 하는 수군의 활약도 사라진 채, 32일 동안 단지 요동성을 거쳐 [[안시성]]에 접근하는 데 그쳤다.[* 수비하는 쪽이 공격하는 쪽에 비해 유리한 것은 사실이나 공격측이 수비측보다 유리한 것은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고 전장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쟁 초기 기존의 침공루트와 다소 다른 작전으로 침공하여 순간적으로 고구려를 몰아세웠지만 이내 수비의 이로움이 발휘되어 전선이 고착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성을 깨뜨리며 요동 방어선으로 밀고 들어갔지만 초반 공격자의 이로움이 다했고 수비의 이로움이 시작되어 고구려의 반격을 받고 남은 성에서 고전하였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신성, 안시성, 건안성이 끝까지 버텨내며 시간을 벌어 당나라의 후방이 어지러워져서 철군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군사학에서 공격측은 방어측에 비해 3배의 이점을 가지는 대신, 공격측이 방어측에 비해 더 많이 가진 전력에 3을 곱하고 그것을 더 많이 가진 물자로 나눈 값만큼 빨리 전투력이 소진된다. 다시 말해, 공격측의 병력이 10,000명, 방어측의 병력이 10,000명이면 방어측은 30,000명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 같은 부담을 받지만, 대신 10,000명인 쪽 역시 30,000명의 병력을 운용하는 것에 맞먹는 속도로 물자를 소진하며, 따라서 공격측이 방어측의 3배만큼 물자를 가지고 있어야 이 우세를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공격측에 비해 방어측의 물자가 훨씬 많고, 방어측 역시 이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요새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요새의 구성에 따라서 공격측과 방어측은 시작할 때부터 대등해지거나 심지어 방어측이 압도할 수도 있다.] 이 시기에 [[연개소문]]은 대군을 보내 당나라 본대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였다. 대대로 고정의,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 남부욕살 대형 고혜진 등이 지휘하는 15만 대군은 [[안시성]] 외곽에 도착하여 사방 40리에 뻗친 진용을 갖추었다. 자세한 것은 [[주필산 전투|항목 참조]] >"[[태종(당)|진왕(秦王)]]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中 대대로 고정의의 발언}}} 조정의 영수답게 노련한 인물인 대대로 고정의는 당나라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지구전을 해야한다 하였다. 당태종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눈앞에 둔 탓인지 고연수와 고혜진은 이 작전에 따르지 않았다.[* 서영교, 주필산(駐蹕山) 전투와 안시성(安市城)][* 실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터에서 일선 장수들이 공에 눈이 멀어서 [[위연|총사령관의 말을 듣지 않거나]], 혈기왕성한 장수들이 [[마속|지휘부의 말을 듣지 않고 단독행동을 하는 경우]]는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고연수는 군대를 거느리고 안시성 외곽 40리에 진군하였고 곧바로 다시 안시성 외곽 8리까지 진격, 당나라가 도발 삼아 보낸 돌궐 기병 1,000명을 격파한다. 고연수 및 고구려군은 ‘다루기 쉽다’ 하며 기세가 올랐다고 한다. 이에 강하왕 [[이도종]]은 고구려의 대군이 이곳에 집중한 틈을 타, 평양을 기습적으로 타격한다는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때 이도종이 요구한 병력은 5,000명.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 이도종의 주장이었는데,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고구려 군대의 숫자나 위용이 당나라 지휘관들에게도 압박을 주는 규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은 이런 모험책을 듣지 않았다. [[살수대첩|이미 요동을 돌아서 압록강 방면으로]] [[사수 전투|평양부터 치자는 전략을 썼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려주는 사례들]]도 있고.[* 철수해 돌아온 뒤에 당태종은 자신이 왜 고구려 같은 소국에 패한 거냐고 분해하다가 이도종이 "그때 제가 요동을 돌아 평양부터 먼저 치자고 건의를 드렸었는데 폐하께서 거부하셔서..."라고 하자 "'''그랬었나? 기억이 안 나는데...'''"라고 대답했다. 정말 기억이 안 났을지는... ][* (주필산에서) 맞붙어 적에게 제압당하고 장차 떨치지 못하였는데 돌아와 위공(이정)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모아갔는데 저런 하찮은 것들에게 곤란을 당하니 어찌된 것이오?’ 이정이 답하기를 ‘이는 도종이 알 것입니다.][* 다만 1차 여당전쟁 당시에는 만약 이세민이 안시성을 우회했다면 고구려에게는 정말 큰일이 터졌을 것이다. 요동성이 떨어진 이상 이미 당나라의 손에는 요동성에서 취한 '''50만 석'''의 곡식이 있었고, 당나라군의 편제인 육화진에서 1만 4천의 전투병에 반드시 6,000여 명의 치중병(=보급운반병)과 마차가 딸려있으므로 이 곡식을 싣고 요동을 우회해버릴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미 살수대첩의 경험이 있는 이상, 고구려는 우회해서 돌아오는 당나라군을 더 큰 위협으로 보고 대군을 돌려 공격했을 것이며, 안시성, 건안성, 신성은 정말 큰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이때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은 연개소문을 문죄하러 왔을 뿐, 교전은 바라지 않고 다만 신하의 예만 취해준다면 철수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고 고연수는 이에 자만하였다고 한다. >태종이 밤에 문무백관을 불러, 몸소 지휘하여 이적의 욱기(勖騎) 15,000명을 적의 서쪽 고개에 진치게 하고[* 책부원귀에는 전원 기병, 기타 기록에는 보병 기병 혼합이라 기록되어있다. 이는 당시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일시 전환하는 전술이 동아시아에서 유행하고 당에 수입된 것에 주목하여 주필산 전투에서도 같은 전술을 구사하였으리라 추정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세적도 이를 구사하여 기병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 장손무기는 장군 우진달 등을 이끌고 정예병 11,000명을 기병(奇兵)으로 하여,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적의 등뒤를 치고, 태종은 스스로 기병(會騎) 4,000을 이끌며, 고각(鼓角)과 기치를 숨기고 적의 진영 북쪽 높은 봉우리 위에서 달리기로 하였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책부원귀》''' 권116}}} 기록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이세적, 장사귀 등은 서쪽에 진을 쳤고, 장손무기와 우진달 등은 정예군을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동쪽, 혹은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세민 본인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대가 홀로 포진한 것을 보고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고자 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자치통감》''' 권198, 정관 19년 6월 22일 무오}}} >주필산 전투에서 6군(친위대)은 고려에게 제압당하였고, 태종이 흑기(이세적의 대장기)를 살펴보라 명하였는데, 척후병이 흑기가 포위되었다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수당가화(隋唐嘉話)上, 中華書局 10~11쪽}}} 6월 22일, 날이 밝으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고연수가 이세적을 먼저 깨트리느냐, 이세민이 먼저 고연수의 후미를 쪼개느냐, 이것은 얼핏 허무해보이기까지 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나라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장창으로 벽을 쌓은 이세적의 진은 고연수의 돌격에 밀리다가 마침내 사방에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포위되고 친위대까지 위태로우니 당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말갈 기병의 칼날이 이미 당태종의 본진을 쑤시고 있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명하여 고각을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고연수 등이 크게 놀라 장차 대처하려 했지만 그 진이 어지러워졌다. 그때 번개가 쳐서 당군의 위세를 도왔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책부원귀》''' 권116}}} 하지만 이세적의 군대가 와해되는 것보다 장손무기의 군대가 고연수의 후미에 쐐기를 박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이세민이 이끈 친위기병 역시 고연수의 군대를 쪼갰다. [[여포|흰 옷에 화극과 화려한 화살통을 무장한 무사가 천둥 번개와 함께 무쌍을 찍으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는데]] 그가 바로 [[설인귀]]였다. 이 틈을 타 모루의 역할에 성공한 이세적의 부대가 역습에 나섰고, 고연수의 군대는 셋으로 쪼개져 당나라군과 대응하였다. 이때 [[당나라군|당군]]은 출구 쪽을 어느 정도 띄어 두어 고연수군이 퇴로를 찾아 몰리도록 하였는데 고연수는 이를 따라 탈출하여 36,800 잔군을 거느리고 탈출한다. 10,000에서 20,000에 이르는 [[고구려#s-7|고구려군]]이 전사하였는데 비명과 통곡이 산골짜기를 메우고, 개울이 붉게 물들었으며 뼈와 창검이 쌓였다고 한다. 고연수는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는데 당나라군은 이들을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였다. 고연수 등을 비롯한 고구려군 37,000여 명은 자그마한 구릉에 올라가 방어책을 강구하려 하였지만, 당군이 이를 포위하자 결국 항복하였다.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500여 명이었고, 말갈 병사 3,300여 명은 '''[[생매장|모두 땅에 파묻어버렸다.]]'''[* 고구려 포로들에 대한 후한 대우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이 이유에 대해 [[자치통감]]은 이 전투에서 말갈병이 당나라 황제의 진을 침범했기 때문이라 했다.] 또 이 전투에서 당군이 노획한 말만 5만여 필이나 되었으며, 항복한 고연수는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은 사농경(司農卿)으로 봉해졌다.[* 주필산에서 당군 주요 전사자로는 좌무위 장군 왕군악이 있다. 《[[신당서]]》 기록은 '六月丁酉,克白岩城。已未,大敗高麗于安市城東南山,左武衛將軍王君愕死之'.]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